[사육곰 산업 종식 ]9월 말, 한 사육곰 농장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9월 말, 방송 촬영을 위해 한 사육곰 농장을 다녀왔습니다. 이미 여러 번 다녀왔고 언론에도 수 차례 보도되어 익숙한 곳인데도, 갇힌 사육곰들을 또다시 마주하려니 농장 초입 들어선 순간부터 벌써 긴장이 됩니다.

화천의 곰들도 최상의 환경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배설물이 산처럼 쌓인 뜬장에 수십 마리의 곰들이 늘어져있는 이곳의 모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처참한 광경입니다. 농장에 들어서자 배설물이 말라 날리는 먼지가 눈과 코를 사정없이 찌릅니다. 안경과 마스크를 챙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송 연출진이 촬영을 하는동안, 활동가들은 더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곰들의 상태를 살핍니다. 농장주는 특히 건강이 안 좋아진 곰을 한번 봐달라며 활동가들을 불러모았지만, "얘였나, 쟤였나," 똑같은 모습으로 널려있는 이름 없는 수많은 곰들 사이에서 '그 곰'을 찾기란 쉽지 않아보입니다.

농장주와 수의사 활동가가 아픈 곰을 찾아 살피는 사이 혼자 농장을 돌아보던 중, 한 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가 서있는 곳 앞으로 다가옵니다. 저를 바라보는 이 곰과 잠시 눈을 마주쳐보기로 합니다.

곰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철창 속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러갈까. 너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좀 더 넓은 세계로 간다면 너는 어떤 표정일까. 그때 나는 너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 눈 밑 상처가 많이 따가워 보이는 너에게는 **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야겠다. 만약 이 농장의 곰들을 구조하는 날이 온다면 눈 밑의 그 상처로 너를 맨 먼저 알아볼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촬영이 끝났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나와 눈을 마주치던 그 곰도 뒤에 누워있는 다른 곰들 사이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눈 밑에 상처가 있던 그 곰을 다시 찾으려했지만 도통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하나의 이름으로 내 앞에 서있던 곰은 다시 수많은 이름 없는 사육곰으로 사라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칠롱, 칠성, 어푸, 푸실, 라미, 미남, 미소, 주영, 우투리, 소요, 덕이, 알코, 그리고 유일이까지 각자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화천의 열 세마리 곰들과, ‘279마리 사육곰’으로 불리는 남은 곰들을 함께 떠올려봅니다. 오랜 시간 279마리 사육곰 중 하나였을 화천의 곰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나니, 이제는 ‘그 곰’에게서 초롱초롱한 눈빛과 장난스러운 몸짓과 진한 우정을 발견합니다.

언젠가는 남은 ‘279마리 사육곰’에게도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뒷발을 저는 곰에게는 약을 먹이고, 눈 밑이 긁힌 곰은 상처가 덧나지는 않는지 지켜보고 싶습니다. 화천의 곰들과 다르지 않은 그 곰들에게서도 더 많은 것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 이날 촬영한 'SBS 물은 생명이다' 1098회 영상은 SBS 홈페이지 또는 다음 링크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https://programs.sbs.co.kr/culture/water/vod/53133/22000547335